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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박동선 프로필 별세 고향 코리아게이트 사망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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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 프로필 별세 고향 코리아게이트 사망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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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은 재미 한국인 사업가로 1970년대 코리안 게이트'의 핵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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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 고향 나이 학력
1935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으며 배재학당을 거쳐 1961년 미국 워싱턴DC 조지타운대를 졸업했다.
박동선과 코리안게이트
미국 정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은 박씨는 1970년대 주한미국 감축 및 인권 탄압으로 박정희 정부와 미국 간 관계가 악화하자 한국에 유리한 여론이 형성되도록 미국 의원에게 돈을 뿌렸다는 혐의로 의회 청문회에 불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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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코리아 게이트’가 터지면서 한·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미국 전현직 의원에게 약 85만달러를 선거 자금으로 제공했다고 자백했다.  이후 박씨로부터 돈을 받은 현직 의원 1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7명이 의회 차원에서 징계를 받았다. 미 검찰은 그를 기소했으나 기각돼 박씨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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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게이트 배경
당시 한국이 박씨를 통해 대미 로비를 시도한 이유는 1970년대 중반 인권 문제 등 박정희 정권에 대해 미 정계의 부정적 인식이 커지던 상황이었다. 
이미 카터 정부 출범 직전인 76년 9월 15일에 상원의원 맥거번은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는 사기극이었으며 박 대통령은 북의 위협을 국내 정치 억압에 이용하고 개인 권력을 강화시키는 데 주력해왔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아예 박 대통령을 “악명 높은 폭군에다 (한국 내) 유일한 판사이자 결정권자”라면서 “(미 정부가) 군사 원조와 신무기 제공으로 남한의 북한 침략 계획에 휘말려 들고 있다. 주한미군은 박 정권의 인질이 아니다”라고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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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시의 안보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주한 미군을 포함해 해외 주둔 미군 규모를 줄이고 동맹국이 방위 책임을 더 많이 부담하도록 하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전격 발표하고 1971년에는 중국과 핑퐁 외교를 시작했다. 이에 큰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이때부터 대미 로비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한국의 이미지는 큰 타격을 입었다. 박정희 정부와 카터 행정부 간 관계 역시 악화해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 촉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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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77년 6월, 3선 개헌 당시 박정희에게 토사구팽 당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하여 박정희 정권을 고발했다. 김형욱은 1973년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있던 상황이었고, 코리아게이트가 터지자 미국 내에서 한국의 불법 로비현황과 박정희 정권의 인권 범죄들을 증언했다. 뉴욕 타임스와의 1977년 6월 5일 인터뷰, 프레이저 청문회 출석, 심지어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정리한 회고록 등은 이러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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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이러한 "배신 행위"에 몇 번이나 미국에 사람을 보내서 한국과 정권의 치부가 폭로되지 않도록 입막음하려 했으며 결국 김형욱은 1979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을 만나기 위해서 프랑스 파리로 떠난 뒤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박동선은 2007년 사담 후세인 정부를 위해 유엔에 로비한 혐의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 조치를 받아 2008년 9월 석방됐다. 석방 후 귀국해 세간의 노출을 피한 채 생활해왔다.

 

박동선 사망
2024년 9월 19일 서울 순천향대병원에서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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